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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묵상

babforme 2020. 4. 19. 01:24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2020년 가해 부활 팔일 축제 수요일

 

<우리는 성경공부로 성경을 가르치는 이의 믿음을 전수받는다>

 

 복음루카 24,13-35

 

      이번 코로나바이러스가 한 것이 참 많은 것 같습니다. 전 세계 모든 사람의 목숨을 위태롭게 만들며 또한 생계를 힘들게 만들었고 부활절 미사도 TV로 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긍정적인 면도 있습니다. 세계가 하나이기 때문에 이기적인 국수주의가 통하지 않는 때가 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했고, 공기가 정화되었으며, 심지어 우리나라에서는 신천지라는 사이비가 만천하에 드러나서 다행히도 많은 이들이 그들의 약은 방법을 통한 전교에 주의를 기울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왜 젊은이들이 사이비나 이단의 허황한 교리에 빠질까요? 성경을 가르치는 사람보다 성경이 더 중요하다고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마치 성경 자체가 문자 그대로 진리인 양 믿는 것에서 이단이나 사이비가 발생하고 또 그런 것에 빠지는 사람들이 생기는 것입니다.

 

      만약 지금 교회에서 요한 묵시록을 성경에서 빼겠다고 하면 될까요, 안 될까요? 물론 그럴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렇더라도 어차피 교회가 교회의 권위로 묵시록을 성경에 넣었으면 교회의 권위로 뺄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의 권위를 교회의 권위 위에 놓으면 안 됩니다. 성경을 해석할 수 있는 권위는 교회에 있습니다.

 

     성경 해석에 관한 이 모든 것은 결국 하느님의 말씀을 보존하고 해석하라는 하느님의 명령과 그 직무를 수행하는 교회의 판단에 속한다.”(가톨릭교회교리서119)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이단이나 사이비에 빠지지 않으려면 그들을 연구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사실 연구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런 시간에 우리의 것을 더 잘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제가 일반대학교에 다닐 때는 집에 여호와의 증인이 많이 찾아왔습니다. 그때도 천주교 신자들이 성경으로 설득하는 여호와의 증인에 많이 넘어갔습니다. 그들이 성경을 펴며 알려주는 교리들은 너무나 설득력이 있었지만, 천주교 신자는 성경에 대해 잘 모르고 있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교리도 잘 몰랐다는 데 있습니다.

 

      저는 여호와의 증인을 피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당당히 맞서 싸웠습니다. 그때 저는 나주 율리아도 믿고 있는 상태였습니다. 당시 공공연하게 성모님의 피눈물 흘리는 책자를 성당에서 나누어주었기 때문에 저도 가감 없이 믿었습니다. 성경을 가지고 설명하는 여호와의 증인 앞에 피눈물 흘리는 성모님의 사진을 가져다 놓으니 그들이 설명하는 성경 말씀이 힘을 잃었습니다. 낮은 수준에 있는 사람이 안 되니 그다음은 더 높은 단계에 있는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그러나 역시 성경은 모르지만, 나주의 피눈물 흘리는 성모님의 사진으로 맞섰습니다. 그들은 저의 믿음을 무너뜨릴 수 없었습니다.

 

      문제는 제가 그때 믿었던 성모님의 피눈물 흘리는 것이 조작으로 드러났다는 것입니다. 나주 율리아가 제병을 휙 던져서 위에서 떨어지는 장면이나 성모님의 피가 돼지 피라는 것, 그리고 율신액이라고 하여 나주 율리아의 소변을 나누어 마시는 장면 등이 PD수첩에서 방영되었습니다. 한 사람이 그것이 잘못된 것이라도 무언가를 확고하게 믿어버리면 성경 말씀도 그 사람을 설득할 수 없습니다. 성경은 믿음을 바꿀 수 없습니다. 믿음을 확증하게 하는 도구가 성경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성경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그대는 그대가 배워서 확실히 믿는 것을 지키십시오. 그대는 누구에게서 배웠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 성경은 전부 하느님의 영감으로 쓰인 것으로, 가르치고 꾸짖고 바로잡고 의롭게 살도록 교육하는 데에 유익합니다.”(2티모 3,16)

 

      믿음을 누구에게서 배웠는지 아는 것이 먼저입니다. 그다음이 그 믿음을 통해 성경을 배우는 일입니다. 그러고 나서는 성경은 교육하는 데 유익합니다. 이 순서를 잊으면 안 됩니다. 성경을 배울 때 성경의 진리를 배우기보다는 그 성경을 가르치는 사람의 믿음을 배우고 있음을 잊으면 안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 당신 부활에 관한 말씀을 성경을 통해 가슴 뜨겁게 설명해 주십니다. 이미 그 제자들은 성경을 잘 아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부활에 대한 믿음이 완전하지 않기에 당황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때 예수님은 그들의 지식이 아니라 그들의 믿음이 약함을 나무라십니다. 그들은 비로소 성경을 알려주시는 분이 누구이신지 알게 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사라지셨습니다. 그것으로 충분했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공부한다고 해서 오류에 빠지지 않을 것이란 생각은 버려야 합니다. 누구든 그 가르치는 사람의 믿음을 받아들이게 되어 있습니다. 성경은 믿음을 전달하는 수단입니다. 성경이 아닌 성경을 가르치는 사람의 믿음이 더 중요합니다.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2020년 가해 부활 팔일 축제 목요일

 

<성경은 믿음을 확증하고 전하기 위해 존재한다>

 

  복음루카 24,35-48

 

      오늘도 어제에 이어 성경에 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어제는 예수님께서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 성경을 가슴 뜨겁게 설명해 주심으로서 빵을 떼어 나누어주실 때 당신을 알아보게 하셨습니다.

 

      오늘은 그들이 사도들에게 자신들의 체험을 이야기하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나타나십니다. 그리고 당신의 손과 발을 보여주시며 당신이 육체를 지니고 참으로 부활하셨음을 믿게 하십니다. 그래도 믿지 못하는 이들이 있어서 예수님은 생선토막을 드시며 참으로 육신으로 부활하셨음을 믿게 하십니다. 그다음에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 말씀을 이해시키십니다. 그러자 그들도 부활을 믿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성경 말씀을 통하여 부활을 믿게 하신 다음에 생선토막을 드신 것이 아닙니다. 이미 부활을 믿게 하신 다음에 그 믿음을 성경을 통해 확증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도 그 믿음을 전하라고 하십니다.

정말 헛갈려서는 안 되는 것이 믿음이 성경을 이해하게 만드는 것이지, 성경이 새로운 진리를 깨닫게 하고 새로운 믿음을 준다고 여겨서는 안 됩니다. 성경 자체가 새로운 진리에 이르게 한다고 믿는 데서 모든 이단과 사이비가 나오는 것입니다.

 

      제가 로마에서 성서학을 배우는 최고의 대학인 비블리꿈 조교와 논쟁을 벌인 적이 있습니다. 박사학위를 하는 포르투갈 사제였는데, 그는 제가 성경을 하다가 교의 신학으로 바꾼 것을 알고는 교의 신학적인 선입관으로 성경을 해석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교리에 대한 믿음이나 선입관 없이 성경을 문자 그대로 연구할 수 있어야 올바른 진리에 다다를 수 있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이런 생각에서 모든 이단이 나오는 것입니다. 저는 물었습니다.

그럼,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를 탈출시킨 것은 이집트 백성이 나쁜 이들이었기 때문이냐?”

그는 그렇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면, 홍해를 건너는 것을 바오로 사도는 어떻게 해석하고 있느냐?”

이렇게 물으니 그는 바오로 전공이 아니라 모른다고 했습니다.

 

      코린토 전서 101절 이하에 보면 바오로 사도는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너는 것을 세례로, 하늘에서 내려온 만나를 생명의 양식으로, 생명의 물을 쏟아내는 바위는 그리스도로 해석을 합니다. 이는 바오로가 세례를 받고 가톨릭교회의 교리라는 선입관이 생겨 이전의 눈의 비늘이 떨어졌기 때문에 그런 해석이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성경은 선입관으로 해석하는 것이지 문자 그대로 이해하려 했다가는 메마른 역사 공부에 머물게 됩니다.

 

      성경은 교회의 믿음에 머물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 교회의 믿음에 저항하기 위해 그 근거를 찾기 위해 사용되었습니다. 자신들이 무언가 주장하려면 근거로 삼을 것이 있어야 하는데, 교리는 안 되고 성경을 진리라 믿게 만들면 그것으로 자신들의 주장을 믿어줄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첫 공의회를 열게 하는 계기가 되었던 아리우스 이단은 성경의 지혜를 그리스도로 주장하였습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피조물이라는 그들의 선입관이 있었기 때문에 구약성경에서 창조 때부터 하느님을 도왔던 첫 피조물인 지혜를 그리스도라 주장하여 교회가 둘로 갈라지게 했습니다.

 

      마르틴 루터는 어떻습니까? 그는 자신과 함께 걷던 친구가 벼락을 맞아 죽는 것을 보고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극도에 달했습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아우구스티노 수도원의 사제가 됩니다. 그러나 죄책감에 떨고 있는 그에게 교회가 말하는 속죄는 너무나 고통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그에게 빛을 주었습니다. 바오로 서간에서 믿음으로 구원에 이른다는 것에 꽂힌 것입니다. 로마에 있는 성 계단 성당에서 무릎으로 속죄하며 오르다가 너무 힘들어서 그냥 걸어 내려옵니다.

 

      그리고는 오직 성경만으로, 오직 믿음만으로, 오직 은총만으로라는 기치를 걸고 교회에 저항합니다. 그 구절은 믿었지만, 하늘나라의 열쇠를 맡기며 교회에 죄 용서의 권한을 준 구절은 무시했습니다. 행위가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야고보 서간도 처음엔 성경에서 제외하려 했습니다. 이렇게 성경을 자유자재로 해석하여 개신교에서 정통이라고 주장하는 종파만 200여 개가 넘습니다. 각자 성경을 조금씩 다르게 해석하여 갈라졌습니다. 그리고 각자가 자신의 해석이 옳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사실 그들이 믿는 것이 다른 것이고 그래서 각자 성경이 다르게 해석되는 것뿐입니다.

 

      신천지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성경이 진리라고 믿고 있어서 신천지의 성경공부에 쏙 빠집니다. 그러나 이는 성경공부를 해서 그 믿음에 다다르는 것이 아닙니다. 힘들고 어렵고 지치고 외로운 이들에게 수십 명이 달라붙어 천국처럼 따듯하게 해 주기 때문에 빠지는 것입니다. 이런 곳이라면 천국이겠고, 또 그렇게 해 주는 이만희가 새로운 구세주라고 믿는 것입니다. 성경이 그 자체로 진리라고 믿으면 절대 성경공부를 통해 자신들의 믿음을 주입하는 그 집단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습니다. 성경은 그 가르치는 사람들의 믿음을 주입시키는 수단입니다.

 

      성경이 믿음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이미 믿는 것을 성경을 통해 확증하고 이웃에게 전할 수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은 이미 믿게 하시고 그것을 성경을 통해 확증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교리를 믿는 것이지 성경을 믿는다고 고백하지 않습니다. 유일하게 가톨릭교회만 그렇습니다. 그 이유는 진리를 찾기 위해 성경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 때 성경이 없어도 교회는 굳이 성경에 의존해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습니다. 이미 진리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진리를 확증하고 전하기 위해 신약성경도 편집하게 된 것입니다.

 

      시골 할머니의 신앙이 성경 박사보다 클 수 있는 이유는 그분들은 성경으로 굳이 증명하지 않아도 성령의 도우심으로 큰 진리를 믿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공부하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성경을 공부하기 위해 먼저 눈에서 교회의 가르침에 대한 믿음으로 비늘이 떨어졌는가를 살피라는 것입니다. 지금 더 시급한 것은 성경공부가 아니라 가톨릭 교리에 대한 올바른 이해입니다. 심판이나 지옥, 교회에 대한 믿음도 온전하지 않으면서 성경공부를 해봐야 또 다른 이단적 생각만 깊어지는 계기가 될 뿐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부활을 먼저 믿게 하시고 그것을 확증하시기 위해 성경을 설명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믿어야 할 진리는 교회이고 교회의 가르침이지 성경이 아닙니다. 성경은 그 믿는 진리를 확증하고 전하기 위해 유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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