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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에서 하늘을~!

제물진두 순교성지. 해안성당

babforme 2021. 11. 19. 15:18

제물진두 순교기념 경당

인천 지역 최대 순교터 위에 건립된 순교기념 경당은

대지면적 109.1㎡(33평), 건축면적 43.3㎡(13평) 규모의 지상 1층 구조로,

차이나타운 입구 한중문화관 바로 왼편에 15m 높이로 건립되었다.

경당 외관은 하늘을 향해 피어오르는 꽃 모양이자 하느님께서 순교자들을 감싸는 두 손 모양을 형상화했다.

순교자 10위의 명패가 적혀있는 좁고 긴 입구로 들어가면 아담한 경당이 나온다.

십자가 유리화 사이로 비치는 빛은 하느님의 빛 같다.

 

경당안에 걸려있는 그림

1845년 제물포를 통해 중국으로 사제품을 받으러갔던 김대건안드레아 신부,

1888년 이곳을 통해 들어온 샬트르 성 바오로회 수녀들, 순교자들이 그려져 있다.

 

제물진두 성지 순교자 영성관

 

1800년대 중후반 흥선대원군이 조정을 통치하던 시기, 조선은 전략적 요충지로서 서양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이때 외세의 침입이 잦았던 인천 지역은 서양세력이 조선으로 드나드는 관문이자,

선교사들에게는 선교 활동의 거점이 되었다.

하지만 외국과의 통상과 이질적 사상의 침투에 완고했던 조정은

외세와 함께 천주교 신자들을 조선 침략의 공범으로 내세워 박해하기 시작하였다.

제물진두는 1866년 병인박해와 1868년 오페르트의 무덤 도굴사건 그리고 서양세력의 침공의 책임을

천주교 신자에게 돌리고 척사 의식을 높이려는 조선정부(대원군)가 만든 인천 지역 최대 순교지였다.

1868년 4월, ‘순교자들의 행적 증거자’ 박순집 베드로의 이모인 김씨와 남편 손 넙적이 베드로,

사위 백치문 사도 요한, 이 마리아의 손자 등 4명이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1871년 5월, 이승훈의 증손자 이연구와 이균구 형제, 이승훈의 손자 이재겸의 부인 정씨와 그의 손자 이명현,

신자로 추정되는 백용석과 김아지도 체포되어 이곳에서 함께 효수형으로 순교하였다.

그리고 이곳은 성 김대건 신부가 부제품을 받고 입국하여 1년여간 조선교회의 사정을 둘러본 후,

1845년 4월 사제품을 받기 위해 중국 상해로 떠났던 역사적인 곳이기도 하다.

또한 1888년 7월 22일,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소속 4명의 수녀가 이곳 제물포항을 통해

순교자의 땅인 조선에 첫발을 내디딘 곳.

 

11월 13일 차이나타운 해안성당

1950년대 선린동에 살던 천주교 화교신자들은 답동성당을 다녔다.

그러나 언어소통 문제와 문화적 이질감으로 화교들만의 성당이 필요했다.

이에 미국 메리놀선교회에서

1960년 7월 17일 북성동에 방을 얻어 ‘북성성당’을 설립하고

선린동에 사는 화교신자들이 이 성당에 다녀 ‘선린성당’이라 불렀다고.
그러나 초창기 성당 공문서 직인에는 ‘인천화교천주교’로 기록돼 있다.

메리놀선교회는 화교들이 다니는 성당이라 중국어에 능통한 고요셉(맥코막) 신부를 초대 신부로 임명했다.

고요셉 신부의 부단한 노력과 메리놀선교회 본부의 원조,

중국인 신자들의 정성으로 1966년 6월 9일 현재의 성당 건물이 완공됐다.

1970년 ‘외국인 토지 취득 및 관리에 관한 법률’ 시행으로 화교들의 재산상 불이익이 심해지며

화교인구는 1972년 정점을 찍고 감소하기 시작했다.
이에 화교 신자들이 자연 감소하고, 구역 내 한국인 신자 수가 증가해 ‘해안성당’으로 이름을 바꾸어

한·중 합동본당으로 운영하다가 지금은 한국인 성당으로 사용하고 있다.

현재 해안성당은 제물진두(濟物津頭)에서 처형된 천주교인 10명을 기리는 ‘제물진두 순교성지’를 관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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