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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성지 순례7 : 나가사키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꼴베 기념관, 혼고우지성당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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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성지 순례7 : 나가사키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꼴베 기념관, 혼고우지성당

babforme 2023. 4. 28. 23:20

막시밀리아노 콜베(1894-1941)

폴란드 출신의 가톨릭 사제이며 순교자, 성인으로 속명은 라이문트 콜베(Rajmund Kolbe).

 꼰벤뚜알 성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수도사제. 

가톨릭과 성공회, 루터교회에서 성인으로 추대되며 축일은 8월 14일이다. 

기자, 정치범,아마추어 무선 (HAM), 약물중독자, 가족, 낙태 근절 운동의 수호성인이며 미디어를 활용한 선교의 선각자.
나치 독일 치하에서 수천명의 유대인을 숨겨주었다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수용되었으며,

그곳에서 다른 사람 대신 죽기를 청해 순교.

 

혼고우지 성당

 

1930년 나가사키에 도착한 콜베 신부는

1931년 혼고우치 히코산 기슭에 '원죄 없으신 성모원'이라 부르는 '성모 기사 수도원'을 설립하였다.

6년 동안 청빈을 지키며 선교(나가이 다카시 박사 세례)와 교육을 하고,

결핵으로 1936년 폴란드로 귀국한 후 일본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성모 기사 수도원 안내도
성모 기사 수도원 성당 건물
콜베 신부상
혼고우치 성모기사 수도원 성당 안-왼쪽에 신부님의 머리칼이 모셔진 소성당이 있다.
콜베신부의 성모신심을 보여주는 제대-고상 아래 성모상이 모셔져 있다.
혼고우치 성모기사 수도원 성당에서 드리는 셋째날 미사
혼고우치 성당에 있는 소성당 내부- 오른쪽 유리관속 백합 줄기에 머리카락이 모셔져 있다.
백합 줄기 사이에 둥근 합에 모신 머리카락 1올

 

성콜베 기념관

 

콜베 사제는 1930년부터 나가사키에서 약 6년간 일본 신학교 교수로 재직했다.

신학생 교육, 가난한 이들 구호를 비롯해 현 히코야마 중턱인 혼고우치에 성모의 기사 수도원을 설립했다.

 

기념관은 1971년 콜베신부 복자품을 기념해 지어졌고, 그의 유품 등이 전시돼 있다.

 

콜베 기념관 전경
수용소에서 한 사람 대신 죽기를 청하는 콜베신부
콜베신부의 방 - 콜베신부가 쓰던 책상과 걸상
콜베 신부의 미사 전례서와 콜베 신부 시성을 알리는 바티칸 신문
콜베신부 시복식 미사 자료사진
콜베 신부 편지
콜베 신부 원고
콜베 신부의 폐결핵 X-ray사진과 일기
콜베 신부 모자
성작
장미와 백합, 성모자가 수놓인 콜베 신부님 제의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콜베신부-191982년 10월 10일 시성

막시밀리안 마리아 콜베신부는,

1910년 꼰벤뚜알 성 프란치스코회에 입회, 막시밀리아노라는 수도명을 택했고, 

1911년 첫 서원. 

1914년 유학간 로마에서 종신서원, 마리아 신심을 표현하고자 수도명에 '마리아'를 덧붙였다. 

로마 대학에서 철학, 신학, 수학, 물리학을 공부했으며, 

1915년 로마의 신학교인 교황청립 그레고리안 대학에서 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프리메이슨의  반교황 캠페인에 대항해 6명의 동료 수사들과 

(원죄 없으신) 성모기사회라는 단체를 조직해, 소책자와 월간지를 출판해 그들의 주장을 반박했다.

콜베 수사와 그의 동료 수사들은 교리문답과 짧은 기도 소책자,

23만 부수의 일간지, 백만 부수가 넘는 월간지 출간하면서 언론인의 수호성인의 근거가 되었다.
1918년 4월 28일 사제품을 받았고, 이듬해인 1919년 폴란드로 귀국했다.

귀국 직후 프란치스코 신학교에서 교회사를 가르치기 시작하였으며, 

라디오 방송국과 출판 사업에 참여하여 언론인으로서 활동했다.

 1930년 동양 선교를 위해 일본에 파견되어 6년간 머물렀다. 일본에 가는 도중 부산에도 잠깐 들렀다.

귀국한 뒤 니에포칼라누프(Niepokalanów) 수도원의 원장이 되었다.

1939년 폴란드가 독일 나치에 점령되며 콜베 신부의 활동은 중단되거나 축소되었다.

이에 콜베 신부는 니에포칼라누프 수도원 유태인을 포함한

전쟁 난민들을 숨겨주는 등 인도주의적인 활동을 이어나갔다.
1941년 2월 17일 콜베 신부는 다른 4명의 신부와 함께 게슈타포에 체포.

당시 나치는 유태인만이 아니라 폴란드의 유력 인물도 체포의 대상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소장은 네에포칼라누프 수도원에서 퇴회한 前 수도자의 명의로 제출된 것이었지만,

게슈타포가 쓴 독일어 고소장에 독일어를 읽을 수도 없는 전 수도자를 협박해 사인만 한 것이었다.
결국 콜베 신부는죄수 번호 16670번으로  아우슈비츠로 끌려갔다. 

1941년 7월 말,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탈주자가 나오자 수용소 지휘관 카를 프리치(Karl Fritzsch, 1903 ~ 1945)

14A동 블럭 사람들 중 10명을 무작위로 끌어내 그들을 아사형에 처할 것을 명령했다.

이 10명 가운데 폴란드군 중사였던 프란치셰크 가요브니체크(Franciszek Gajowniczek, 1901.11.15.~1995.3.13.)라는

사람이  "내 아내!! 아이들!! 그들은 어떻게 될까!!"하면서 울부짖으며 통곡했다.

그러자 콜베 신부는 "나는 가톨릭신부입니다. 가요브니체크에게는 아내와 아이가 있기 때문에

내가 대신하여 처형을 받겠습니다." 라 청하였고 프리치는 이를 승락했다.

콜베 신부와 9명의 죄수가 지하감옥(일명 '13호 감방')에 갇혔다.
콜베 신부는 지하감방에서 의연하게 다른 포로들에게

"우리는 곧 천국에 있게 될 것입니다." 라고 격려하고 기도하며 갇힌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었다.
음식도 물도 주지 않은  2~3주의 시간이 지났지만 콜베 신부와 다른 3명은 여전히 살아 있었다. 

1941년 8월 14일 나치는 병원 잡부로 일하는 범죄자 보프를 시켜서 페놀을 주사해 살해하였다.

 

콜베 신부가 목숨을 구해준 가요브니체크는 1944년 8월 25일까지 아우슈비츠에 있었고,

다른 캠프로 보내졌다가 연합군에게 해방되어 살아남았다.

그의 아내 엘레나는 살아 있었지만, 아들은 전쟁이 거의 끝나가던 1945년 소련 폭격으로 사망했다.

가요브니체크는 1995년 3월 13일 94세의 나이로 세상을 뜰때까지,

콜베의 사랑과 영웅적인 행동이 알려지도록 세계 각지에서 강연했다. 

시복식(1971년 10월 10일)과 시성식(1982년 10월 10일)에도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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