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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우면 감춰질까?

babforme 2023. 9. 7. 12:08

1920년 11월 23일 평안남도 강서에서 태어났다.

창씨명과 관련하여 일부자료에는 ‘시라카와 요시노리(白川義則)’로도 기록되어 있다.

어려서 평안남도 평양으로 이사 해 성장했다. 평안남도 평양의 만수(萬壽) 보통학교에 입학해 4학년을 마친 후,

약송 (若松)보통학교로 전학해 졸업했다. 1934 년 평양사범학교 삼상과에 입학해 1939년 3월 졸업했다.

이후 만주로 건너가 1940년 12월 만주국이 초급장교를 양성하기 위해 펑톈(奉天)에 세운

중앙육군훈련처(봉천군관학교)에 입학해서 1942년 12월에 제9기로 수석 졸업했다.

중앙육군훈련처 졸업 후, 헤이룽장성(黑 龍江省) 바오칭(寶淸)에 주둔하고 있던 만주군 보병 제28단[연대]에서

3 개월간 견습사관으로 근무한 후, 1942년 4월 만주국군 소위로 임관했다.

임관 후, 헤이룽장성 자무쓰(佳木斯)에 있던 신병훈련소에서 소대장으로 근무했다.

1943년 2월 젠다오성(間島省) 옌지현(延吉縣) 밍웨거우(明月 溝)에 주둔하고 있던 간도특설대(間島特設隊)로

옮겨 근무했다. 간도특설대 근무 시 중위로 진급했으며, 같은 해 12월 러허성(熱河省)에서 간도특설대

기박련(機迫連 : 기관총.박격포중대) 소속으로 팔로군 소탕작전에 참여했으며,

팔로군 소탕작전에 참여한 공로로 여단장 상을 수여받았다.

1945년 헌병 중위에 임명되어 옌지(延吉)헌병분단에 배속되어 군관으로 근무했다.

간도특설대는 1938년 9월에 만주국 젠다오성 성장 이범익(李範益)의 건의를 받아들여 옌지현 특무기관장 겸

젠다오지구 고문인 오고에(小越信 雄) 중좌가 주도해서 만든 조선인 특수부대다.

일본인 군관 7명, 조선인 위관 9명과 조선인 사관 9명을 먼저 선발하여 옌지현 명월구에서

같은 해 12월 15일 제1기 지원병 입대식을 열었다. 모두 7기까지 모집한 간도특설대는 총인원 740여 명 중에서

하사관과 사병 전원, 그리고 군관 절반 이상이 조선인이었다.

간도특설대는 일제의 패망으로 해산할 때까지

동북항일연군과 팔로군에 대해 모두 108차례 토공(討攻)작전을 벌였다.

이들에게 살해된 항일무장세력과 민간인은 172명에 달했으며,

그 밖에 많은 사람이 체포되거나 강간.약탈.고문을 당했다.

간도특설대 근무 당시 항일무장세력에 대한 탄압에 대해 “(중략) 이와 같이 소규모이면서도

군기가 잡혀 있는 부대였기에 게릴라를 상대로 커다란 전과를 올렸던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우리들이 추격했던 게릴라 중에는 많은 조선인이 섞여 있었다.

주의주장이 다르다고 해도 한국인이 독립을 위해 싸우고 있었던 한국인을 토벌한 것이기 때문에

이이제이(以夷制 夷)를 내세운 일본의 책략에 완전히 빠져든 형국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전력을 다해 토벌했기 때문에 한국의 독립이 늦어졌던 것도 아닐 것이고,

우리가 배반하고 오히려 게릴라가 되어 싸웠더라면 독립이 빨라졌다라고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동포에게 총을 겨눈 것은 사실이었고

(그 때문에) 비판을 받더라도 어쩔 수 없다. (중략)”라고 회고했다.

1945년 8월 9일 소만(蘇滿)국경을 돌파해서 만주국으로 진격하는 소련군을 만나 옌지현 밍웨거우에서 무장해제를 당했다.

  이후 옌지와 룽징(龍 井)을 거쳐 두만강을 건너 1945년 9월 초 평양으로 귀환했다.

평양으로 귀환 후, 평안남도 도인민위원회 치안대장을 지냈으며 평양에 있던 조만식(曺晩植)의 비서를 잠시 지냈다.

1945년 12월 간도특설대 출신의 김백일(金白一).최남근(崔楠根) 등과 함께 월남했다.

같은 달 군사영어학교에 입교해서 1946년 2월 제1기로 졸업한 뒤 육군 중위로 임관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육군본부 정보국장(대령)으로 재직하면서, 좌익을 제거하기 위한 숙군(肅軍)작업을 지휘했다.

1948년 11월, 박정희 소령이 여순사건 이후 남로당 활동 혐의로 체포되자 구명에 앞장서 문관 신분으로

정보국에서 근무할 수 있도록 했다. 1949년 7월 제5사단장으로 부임 했고,

1950년 4월부터 제1사단장으로 복무하던 중 6.25전쟁이 일어났 다.

1950년 7월 준장으로 진급했고, 1951년 4월 소장으로 진급해 제1군 단장을 맡았다.

1952년 1월 중장으로 진급했으며, 같은 해 7월에는 육군 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을 지냈다.

1953년 1월 한국군 최초로 대장으로 진급했다. 1959년 2월부터 1960년 5월까지 연합참모본부 의장을 지내고

5월말 예편했다. 1960년 7월 주중화민국 대사, 1961년 7월 주프랑스 대사, 1965년 7월 주 캐나다 대사를 거쳐

1969년 10월부터 1971년 1월까지 교통부장관을 지 냈다.

1973년 4월부터 1980년 3월까지 한국종합화학공업주식회사 사장을 지냈다.

2008년 5월 대한민국 건국60주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 고문에 위촉됐다.

2020년 7월 10일 사망했으며,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다.

 

[참고문헌] 󰡔東亞日報󰡕 2020.7.11. ; 󰡔연합뉴스󰡕 2009.3.23 ; 󰡔滿洲軍官學校生徒名簿(抄)󰡕(1941.10) [민족문제연구소 소장 복사본] ; 󰡔韓國名士大鑑 第1輯󰡕(1958.2) ; 󰡔1960年版 大韓民國 行政幹部全貌󰡕(1960.3) ; 󰡔現代朝鮮人名辭典󰡕(1962.8) ; 󰡔1966年版 韓國·北朝鮮人名 辭典󰡕(1966.5) ; 󰡔現代韓國人名辭典(合同年鑑 67年版 別冊)󰡕(1967.1) ; 󰡔平安道人名鑑 󰡕(1973.11) ; 󰡔創軍󰡕(1984.2) ; 󰡔滿洲国軍憲兵の懐古(五族の憲兵)󰡕(1984) ; 󰡔滿洲國軍 誌󰡕(1987.10) ; 󰡔(白善燁回顧錄)韓國戰爭一千日󰡕(1988) ; 󰡔(白善燁 6·25 한국전쟁 회 고록)軍과 나󰡕(1989.7) ; 󰡔(백선엽 육성증언록)實錄 智異山󰡕(1992.5) ; 󰡔對ゲリラ戰 - ア メリカはなぜ負けたか(대게릴라전 : 미국은 왜 졌는가)󰡕(1993.2) ; 󰡔大韓民國歷代三府要 人總鑑󰡕(1993.10) ; 󰡔(白善燁回顧錄)若き将軍の朝鮮戦争 The Korean War(젊은 장군의 조선전쟁)󰡕(2000) ; 󰡔20세기 중국조선족력사자료집(1)󰡕(2005) ; 「외교부 외교사료관 ; 외 교일지」(http://diplomaticarchives.mofa.go.kr

 

민족과 국가 앞에 부끄러운 줄 모르는, 그래서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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