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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이야기

8월 24-25일, 엄마

babforme 2021. 9. 4. 15:27

한달 만에 엄마를 찾았다.

내 삶의자리가 우선이다보니 엄마에게 가는 길이 생각보다 멀다.

날짜를 정해놓고 가는게 아니라 기분내킨 날 바로 준비해 나서는 길이라 들쭉날쭉이다.

그날도 그렇게 길을 나섰다.

 

8월 24일 안흥
조금 되직하게 쑨 콩죽

아주 가끔(1-2년에 한번 쯤) 어린시절 맛있던 기억에 콩죽을 끓인다.

팥죽만 아는 우리식구들은 콩죽을 입에도 대지 않지만

어린시절 기억이 떠오를 때면 콩죽을 조금 쑤어 혼자 먹곤 한다.

 

엄마에게 갔다와야지 생각이 든 날, 무얼 해갈까 냉장고를 살핀다. 

채소서랍에 얌전히 누워있는 생협 콩물 두 봉지,

아~ 좋다! 오랜만에 콩죽을 쒀야겠다.

엄마에게 전화하니 뭘 그런 걸 힘들게 하냔다. 일단 긍정이다. 

찹쌀과 멥쌀 1:2 비율로 씻어 불려 급하게 압력밥솥에 진밥을 하고

넓은 냄비로 옮겨 콩물을 부어 뭉근히 끓이니 고소한 콩죽이 몽글몽글 정겹다.

 

엄마는 겨울이 되면 어린 자식들에게 콩죽을 자주 끓여주셨다.

가을 거드미(거둠질)가 끝나면 서리태를 삶고 맷돌에 갈아 고소한 콩물을 만들고

쌀을 씻어 반들반들 윤이 나는 무쇠솥에 넣고 큰 나무주걱으로 눌어붙지 않게 저으며 콩죽을 끓였었다.

아궁이에 타오르던 각지나무불꽃이 참 따뜻했었지.

지금처럼 특별한 먹을거리가 흔치 않던 시절에 엄마가 쑤어주는 콩죽은 깊은 겨울밤 밤참으로도 아주 좋았다.

 

엄마에게 갈 꾸러미

콩죽이 식는 동안 가까운 화서시장에 들러 씨없는 청포도를 사고 말랑이 복숭아를 더한다.

다 드신 스팸도 한묶음 끼워넣고 엄마의 만찬상을 달콤하게 하는 카스텔라 한상자로

엄마에게 갈 장바구니는 꾸려졌다.

 

재택하는 아들과 점심을 먹고 세남자의 저녁과 아침에 대해 아들에게 일러주고 길을 나선다.

 

행랑채와 대문간 사이 빈터에 상사화가 피어있다.

그날, 엄마에게 가는 길은 험했다. 

고속도로에 쏟아붓는 비 - 앞도 옆도 잘안보이는 고속도로, 힘들어간 어깨~

 

엄마가 황반변성으로 눈을 잃기 한참 전,

행랑채와 대문간 사이 빈터에 심어놓은 상사화가 비맞은 얼굴로 저혼자 피고 지고,

대문간 판재들에도 세월이 잔뜩 내려앉았다.

사는 것 역시도 혼자 피고지는 꽃인걸~

 

콩죽을 드시는 엄마

늘상 잠겨있는 대문을 지나 고임쇠로 고여닫은 작은 쪽문을 열고 엄마를 부른다. 

방으로 들어가기 전 하나있는 나름은 현관문?이 안열린다.

늘상 열려있던 문을 잠가놓은 엄마, 천천히 문이 열리며 무섬증에 잠갔다고~

문을 잠그면 무섬증이 도망가? 괜찮은 척 큰소리로 ㅎㅎ 웃으며 묻는다.

웬일로 텔레비젼도 조용하다.

이러구러 수다를 떨다 콩죽으로 소박하게 차리는 저녁상, 콩죽먹은 게 10년도 훨씬 전이라며 맛나게 드신다.

어쩌면 어린것들에게 먹이려 콩죽을 쑤던 젊은엄마의 행복한 기억을 드시는 걸지도 몰라~

 

전화로 응송하며 기도하는 엄마

인천으로 이사가신 교우님이 기도봉사를 한다.

고맙게도 별일 없는 저녁 8시면 날마다 걸려오는 전화,

아득한 터널 어디쯤서 비치는 희미한 빛처럼 깜깜한 엄마의 시간에 빛이 되는 시간~

엄마는 언제부턴지 '은총'을 '성총'으로 바꾸어 '성총이 가득하신 마리아님~' 응송을 한다.

그래, 무엇을 더 바랄까? 이만이나 살아 서로 안부 물을 수 있음이 성총인 것을......

엄마의 시간이 거룩하기만 하다.

 

주무시다 일어나 '은총이 가득하신~' 묵주기도를 하시는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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