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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에서 하늘을~!

수리산 성지 고택성당

babforme 2023. 4. 1. 20:58

맛난 점심 뒤 거룩한 땅 근처에 왔으니 잠깐 거룩해지기로~

아주 오래전 (희미한 기억으로 2001-2년쯤?) 위령성월을 맞아 구역식구들과

최경환 프란치스코 성인 묘소에서 연령을 위한 기도를 바쳤던 때가 첫 수리산성지 방문이었지 싶다.

그땐 성인묘역도 지금처럼 잘 단장되지 않아 비탈길을 힘들게 올라갔었던 것 같은데...... 

성인의 집터에 고택성당도 없었다는~

 

병목안 삼거리에서 수리산 성지까지는 좁은 도로를 제법 달려야 한다.

계곡을 따라 좁은 길을 달리면 계곡 양쪽 산기슭에 잇대어 지은 수리산 성지 순례자성당과

이성례마리아의 집이 있고, 골짜기 따라 조금 더 깊숙히 올라가면 이번에 처음 알게 된

최경환 성인 일가가 살았던 집터에 지은 고택성당이 있다.

사진자료 속 최경환 성인 고택은  2020년까지는 최경환성인 고택으로,

2021년부터는 고택성당으로 표지석을 바꾸어 세웠네.

 

고택성당 전경

좁은 길에서 약간 비껴 산비탈에 면해 앉은 집터, 바위를 그대로 드러낸 채 비탈쪽 벽을 세웠다.

이 좁고 열악한 집터에서 신앙을 증거하던 성인의 삶이 새삼 가슴 시리다.

박해를 피해 쫓기고 쫓기며 지켜가던 신앙의 절실함, 그 간절함이 가늠조차 되지 않는데......

 

안으로 들어가면 보이는 짧은 복도
이성례 마리아 복자, 최경환 프란치스코 성인 부부 초상

최경환프란치스코 성인(9월 20일)

1805.10.15~1839.9.12 

순교 한국 회장

 

일명 영환(永煥), 영눌(永訥), 치운이라 한다.

우리나라의 두번째 방인사제인 최양업(崔良業 토마스, 1821-1861)의 아버지이다.

 

충청도 홍주(洪州) 땅 누곡(樓谷, 지금의 충남 청양군 화성면 농암리의 다락골)에서 부친 최인주(崔仁住)

모친 경주이씨(慶州李氏) 3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교회창설 때부터 천주교를 믿어 온 집안이라 어려서부터 열심히 신앙 생활을 했고, 

성장해서 '내포(內浦)지방의 사도' 이존창(李尊昌)의 후손인 이성례(李聖禮, 마리아)와 혼인한 뒤, 

교우들이 많이 살고 있는 서울의 벙거지골(笠洞) 로 이주하였다.  

 

그러나 박해와 외교인들의 탄압 때문에 가산을 버리고 서울을 떠나 강원도 금성(金星), 

경기도 부평(富平)을 거쳐 과천(果川)의 수리산(현재의 안양시 만안구 안양9동 수리산)에 정착하였다

여기에서 회장으로 신자들과 교우촌을 돌보며 오직 신앙생활에만 전념하였다. 

그리고 1836년에 큰 아들 최양업(토마스)를 모방(Maubant, ) 신부에게 신학생으로 맡겨 마카오로 유학보냈다.

 

이곳에서 그는 자기의 본분을 지키며 종교서적을 자주 읽고 가난 중에도 애긍시사를 하니

사람들은 그를 존경하여 그의 권고를 즐겨 듣고 천주교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려고 멀리서도 찾아오곤 하였다. 

최 토마스 신부는 훗날 다음과 같이 회고 하였다.

저의 부친은 자주 묵상하고 신심서적을 대하셨으며, 언제나 종교와 신심외의 것은 말하지 아니하셨으며, 

아버지의 말씀은 힘 있고 설복시키는 능력이 있어 모든 이에게 천주의 사랑을 심어 주셨다.”

 

기해박해가 엄습하고 또 서울과 인근 지방이 기아에 시달리고 있을 때, 

회장으로 임명된 그는 많은 의연금을 모아 옥에 갇힌 사람들을 돌보아 주었고, 순교자의 시체를 매장하였다. 

그리고 집안사람들에게 순교를 준비할 때가 된 것을 알고 성패와 성물을 감추었으나 서적은 감추지 아니하였다. 

이것을 보고 조카 최 요한이 놀라서 다른 교우들은 혐의를 받을만한 것을 모두 감추는데

이 책을 그렇게 내어 두십니까?” 하고 물었더니 성물은 불경한 무리들이 더럽히지 못하게 감추는 것이지만, 

서적이야 어디 강복한 물건이냐? 군사가 전쟁 때에 병서를 참고하지 않고 언제하겠느냐?” 하고 대답하였다고 한다.

 

1839 7 31일 밤 서울에서 내려온 포졸들이 수리산에 이르러 고함을 치며 최 프란치스코의 집으로 달려들었다

그는 조금도 놀라지 않고 포졸들을 친절하게 맞이하였고, 이에 포졸들은 안심하고 누워 잠을 잤다. 

해뜰 무렵에 포졸들을 깨워 음식을 대접하고는 프란치스코와 남자들과 큰 아이들이 앞장서고, 

그 뒤로는 부인들과 젖먹이들이 따라가고, 맨 뒤에는 포졸들이 따라왔다. 

때는 7월이라 찌는 듯한 더위로 빨리 걷지를 못하였고 어린 아이들은 피곤하여 울부짖었다. 

행인들은 악담과 저주를 퍼붓는 사람도 있고 불쌍하게 보는 사람도 있었다. 

이에 그는 형제들아 용기를 분발하라. 너희 앞을 서서 갈바리아로 올라가시는 주 예수를 보라!”고 하며 격려하였다. 

일행은 날이 저물어서야 옥에 당도하여 밤을 지냈다.

 

포장은 프란치스코를 두 차례나 주리를 틀게 하고, 

뾰족한 몽둥이로 살을 찌르게 하여 배교한다고 할 때까지 고문을 하게 하였다. 

성인의 아들 하나가 나라 밖으로 나갔다는 것을 안 포장은 더욱 매질을 하여 그의 팔과 다리의 뼈가 어그러졌다. 

그는 태형 340도와 곤장 110도를 맞았다. 

다른 많은 교우들은 석방되었으나 끝까지 신앙을 증거한 이는 프란치스코와 그의 아내와 일가 부인 3명뿐이었다. 

그 후 프란치스코는 포장대리 앞에 끌려 나가 치도곤 50대를 맞으니 그것이 최후의 출두요 형벌이요 신앙고백이었다. 

옥으로 돌아온 그는 예수께 내 목숨을 바치고 도끼날에 목을 잘리는 것이 소원이었으나

옥중에서 죽는 것을 천주께서 원하시니 천주의 성의가 이루어지이다라고 말한 후 몇 시간 뒤에 숨을 거두었다. 

때는 1839 9 12일이요, 그의 나이는 35세였다.

 

1925 7 5일 교황 비오 11(Pius XI)가 시복했고, 1984 5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맞아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Joannes Paulus II)가 시성하였다.

 

이성례 마리아 복자(1801-1839)

 

순교자 이성례 마리아는 내포지방의 사도로 불리는 순교자 이존창 루도비코 곤자가의

후손으로 1801년 충청도 홍주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였으며 남성처럼 씩씩하고 괄괄한 성격을 지녔던 순교자는 

17세에 같은 날 체포되어 장하 순교로 신앙을 증거하고 성인 반열에 오른 성 최경환 프란치스코와

혼인하여 홍주 다락골의 새터(현 충남 청양군 화성면 농암리)에서 살면서 

1821년에 조선의 제 2대 방인 사제이며 땀의 순교자로 조선 방방곡곡의 교우들을 보살피다

하느님 품으로 가신 장남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을 낳았다.

 

마리아는 언제나 집안일을 지혜롭게 꾸려나갔고, 일가친척들이 불화 없이 지내도록 하는 데 노력하였다. 

그러다가 남편의 뜻에 따라 가족과 함께 한양으로 이주하였으며, 박해의 위험이 있자 다시 강원도를 거쳐 

경기도 부평, 수리산 뒤뜸이(현 경기도 안양시 안양 3)이주하여 교우촌을 이루어 살게 되었다.

 

공소를 방문한 모방 베드로 신부님에게 신학생으로 선발된 장남 최양업 토마스를  마카오로 떠나보냈다.

어린 자식들이 굶주림에 지쳐 힘들어할 때면, 요셉과 성모 마리아의 이집트로 피난 이야기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타 언덕을 오르던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인내심과 참을성을 키워 주었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난 뒤, 

남편 최경환이 한양을 오가면서 순교자들의 시신을 찾아 묻어주고 불쌍한 교우들을 돌보기 위하여 동분서주하자, 

마리아는 남편의 뒷바라지를 하면서 자식들을 보살폈다.

그러던 중 찜통같은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7월 말 새벽 포졸들이 마을에 들이닥쳤고,

순교자 이성례 마리아는 포졸들에게 줄 밥상을 차려 조반을 먹게 한 다음

남편 최 프란치스코가 앞장서고 어린 아이를 업은 이성례 마리아와 40여명의 교우들이 행렬을 지어 한양으로 향하였다.

 

마리아는 남편과 다른 자식들과 격리되어 젖먹이 스테파노와 함께 여인들의 감옥에 수감되었다.

문초와 형벌로 팔이 부러지고 살이 너덜너덜 찢어진 순교자에게 육체적 고통보다 더 큰 고통은

젖먹이가 먹지못해 엄마 눈앞에서 굶어 죽어가는 것이었다.

 

마리아는 옥사한 남편과 굶어 죽어가는 어린 것을 보며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곤장과 칼엔 용맹하였으나 자식에게 약해진 순교자는 거짓으로 배교한다고 하여

현세적, 영신적 구원을 함께 도모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순교자는 석방되었으나 장남 최양업이 신학생으로 중국에서 유학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며 

다시 체포되어 형조로 압송되었다.

형조에 이르자, 이성례 마리아는 그곳에 수감되어 있던 성녀 정정혜 엘리사벳, 

현경련 베네딕다 등 용감한 신자들을 만나 큰 용기를 얻게 되었다.

 

마리아는 재판관 앞으로 나가 전에 한 배교를 용감하게 취소하였다. 

또 모성애를 비롯하여 모든 유혹을 용감히 이겨냈으며, 

옥중에서 자신의 막내아들이 굶어 죽는 끔찍한 모습을 보아야했다.

 

그러나 순교자는 두 아들을 하느님께 바친 것을 기뻐하였다. 

그리고 유리걸식하는 네 아들들에게 구원에 유익한 말과 모범으로 교리와 기도문을 가르쳤다. 

둘째 아들 최의정 야고보는 한 달 이상 감옥을 오가면서 모친과 신자들의 시중을 들어주었다.

마리아는 관례대로 마지막 문초와 형벌 끝에 사형 선고를 받았고,

 감옥으로 찾아온 자식들에게 형장에는 오지 말라.”고 하였으며 자식들에게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이제는 다들 가거라. 절대로 천주와 성모 마리아를 잊지 말아라. 서로 화목하게 살며, 

어떤 어려움을 당하더라도 서로 떨어지지 말고 맏형 토마스가 돌아오기를 기다려라.”

 

1839 12 27, 마리아는 동료 신자 6명과 함께 형장으로 정해진 당고개(현 서울 용산구 원효로 2)로 끌려 나갔다. 

그런 다음 영광스럽게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였으니, 당시 그녀의 나이는 39세였다.

 

고상 위로 쏟아지는 불빛
순교를 상징하는 빨강색 초와 제대
좀 더 가까이에서 본 제대
고택성당 제대 앞에 모셔진 최경환 성인 유해
옆에서 본 제대와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유리 뒤쪽은 더 이상 깎을 수 없는 바윗돌 벽-성당1층 제대 맞은편
바윗돌이 그대로 드러나 있는 성당 2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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