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이 땅에서 하늘을~! (98)
소소리바람이 불면~
예수, 마리아의 형상을 새겨 그리스도교인들을 색출하는데 쓰인 동판화, 후미에. 1614~1635년 사이 일본 나가사키 지역에서만 통계상 28만여명의 신자들이 순교했다고 전해진다. 우리나라와 가장 가까운 일본의 신앙도 우리네와 비슷하게 신앙선조들의 순교의 피 위에서 더 굳건해졌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원폭의 피해지로 잘 알려진 나가사키는 가톨릭이 처음 전해진 곳이며, 일본에서도 가장 많은 신자와 성지가 있다. 나가사키 평화공원, 원폭투하지에서 그리 멀지 않은 우라카미 성당~ 버스에서 보고 설명을 들으며 지나 오우라 성당으로 가려던 계획이 길동무님의 강력한 요구로 갑자기 바뀌었다. 하여 목적지가 오우라 성당에서 우라카미 성당(천주당)으로 자연스레 정리되고 우리는 버스에서 내렸다. 우라카미 성당은 나가..
엔도 슈사쿠 문학관에서 15분여 달리니 오늘 미사가 예정돼 있는 시츠성당! 버스에서 내려 높이 쌓아올린 축대 위로 구불구불 나 있는 좁은 길을 걷는다. 이런 험한 곳에 숨어들어 살아내느라 얼마나 고단하고 힘들었을까? 그 길 중간 쯤 축대 아래 밭에서 차에 싣기 위해 커단 양파자루와 씨름을 하는 수녀님도 만나고...... 높은 축대 위로 난 길을 따라 올라와 마침내 마주한 시츠성당은 너무나 소박했다. 1865년 3월 “신자 발견” (오우라천주당)뒤, 프티쟝(Bernard Thadée Petitjean) 신부는 9월에 소토메(外海)를 찾아와 신자들을 만났다. 그리스도교 금령이 풀린 뒤 시츠(出津)에 임시 성당을 짓고 선교를 한 페뤼(Albert Charles Arsène Pélu)신부에 이어 1879년 소토..
히라도 타비라 성당을 뒤로 하고 찾은 곳은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기념성당! 1549년 예수회의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1506~1552) 신부가 복음을 전하면서 일본의 가톨릭 역사는 시작되었다. 일본 큐슈(九州) 남부 가고시마에서 복음을 전하던 하비에르 신부는 지방 영주인 다이묘(大名)와 불승들이 박해하자 1550년 9월 나가사키현 남서해 지역에 있는 히라도(平戶)로 옮겨 복음을 전했다. 당시 히라도는 국제 교류 도시로 16세기부터 유럽 문물을 많이 받아들여 아시아와 유럽이 섞인 독특한 문화를 형성했다. 또 히라도는 조선시대 임진왜란 때 많은 병사를 파견했고, 이곳 다이묘 마츠우라는 귀국 할때 조선 도공 100여 명을 끌고와 '히라도야키'라는 도자기 문화가 시작되기도 했다. 하비에르 신부는 히라도에서 머문..
일본 가톨릭교회는...... 1549년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의 일본 도착으로 가톨릭 신앙이 전해졌다. 지방 영주의 개종 등에 힘입어 당시 신자수는 30만을 넘어서는 등 교세가 급성장했으나, 1587년 총집권자인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제추방령을 내리면서부터 시작된 박해는 1614년에 에도막부(江戶幕府)가 금교령(禁敎令)을 선포한 이후 259년간 혹독하게 이어진다. 그렇게 일본교회는 침묵했다. 개화기 이후 신앙의 자유가 허용되면서 숨어서 신앙을 이어온 신자들(가쿠레 기리스탄)이 발견됐고, 새롭게 교계제도를 갖추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교세는 16개 교구 신자 50여만명 정도~ 유명, 무명의 순교자를 모두 합치면 4~5만 명의 순교자가 하느님을 위해 생명을 바쳤다고 기록돼 있다. 수많은 순교자 중..
새벽부터 서둘러 가깝고도 먼 이웃나라 일본에 도착했다. 8시 45분 인천공항을 떠나 한시간 20여분 하늘을 날아 온 곳! 준비된 버스를 타고 사사오카 성당으로 가는 길은 아주 단정했다. 우리 사회에서 몇 년전까진 자주 들었던 용모단정이라는 단어가 절로 떠오르는 일본의 거리~ 11시 5분쯤 후쿠오카 공항에서 탔던 버스를 30여분 달려 큰길에서 내렸다. 가파르지 않은 언덕길을 실실걸어 오늘의 첫목적지, 일본도착 첫미사를 드릴 사사오카 성당에 도착! 사사오카 성당은 높이 솟은 십자가 탑과 입구에 있는 입간판만 아니면 성당인지도 잘 모를 외관을 하고 있었다. 성당 천정 가운데 하트는 예수님을 상징하고, 그 하트를 중심으로 곡선으로 뻗은 천정라인과 맞닿은 푸른 스테인드글라스는 성모님의 펼친 손과 푸른옷자락을 의미..
코로나19 이후 처음으로 맘 편하게 맞는 부활절! 아직 성당 안에선 마스크를 하는게 교구지침이지만 이젠 먹을거리도 함께 할 수 있을만큼 코시국에서 자유스러워졌다. 부활미사 뒤에 본당에서 음식 좀 한다하는 왕년의 선수들이 모두 모여 만든 잔치국수를 먹었다. 근래들어 처음 맛보는 기막힌 육수의 맛, 멸치를 비롯 육수 낼 재료들 손질에도 며칠이 걸렸다지. 고명으로 호박이랑 당근, 달걀지단과 소고기까지 올라간 말 그대로 잔치국수가 참 맛나다. 부활성야에 나눈 떡과 과일, 김치로 한상이 차려진 잔치국수상에서 예수님 부활과 성당 국수잔치 부활을 함께 맛보는 행복한 시간! 이렇게 모두 모여 일용할 양식을 나눌 수 있게 허락해 주신 부활한 예수님 디따 감솨~!
수난감실(성체보관장소) 주님만찬 성목요일에 축성한 성체를 주님수난 성금요일 예식에서 분배할 때까지 보관해 두는 제2경당이나 측면 제대로 성당의 주건물 밖 적당한 곳으로 한다. 역사적으로 성체를 보관하는 관습은 장엄한 전례로 시작되었고 여기에서 사십시간기도가 생겨나기도 했다. 성체 보관 장소(수난 감실)는 ‘주님의 묻히심’을 드러내려는 것이 아니라, 성금요일의 성체 분배와 병자들을 위하여 성체를 모셔 두고, 예수님께서 “나와 함께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더란 말이냐?”(마태 26,40) 하신 말씀을 기억하며 주님 앞에 머물고자 하는 데 목적이 있다. 성체는 감실이나 성합에 모시고 문을 잠가야 하며, 성체를 성광에 모시어 내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금요일 오후에 숨을 거두셨기 때문에 이 감실은..
성지 주일로 더 잘 알려져 있는 주님 수난 성지 주일은 성주간의 첫째 날이다. 성지를 축성하고 행렬을 하는 동안 승리의 기쁨으로 시작하여 그리스도의 예루살렘 입성을 재현한다. 이는 그리스도왕을 공경하는 승리의 행렬에서 가장 중요하며 모든 신자들이 참여한다. 이 미사로 우리는 성주간을 시작한다. 장엄한 미사 전에 성당 밖에서 행렬을 하거나 단순한 입장을 하여 주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기념한다. 가능하다면 회중은 미사를 드릴 성당이 아닌 장소(성당이나 경당)에 모인 뒤 미사 드릴 성당으로 행렬해 가는 것이 좋다. 신자들은 성지를 손에 들고 성가를 불러 주례자에게 인사한다. 주례자는 성지를 축복하는 특별한 기도로 예절을 시작해 성지에 성수를 뿌린다. 사제는 주님께서 입성하시는 복음 말씀을 봉독하고 간단한 강론을..
맛난 점심 뒤 거룩한 땅 근처에 왔으니 잠깐 거룩해지기로~ 아주 오래전 (희미한 기억으로 2001-2년쯤?) 위령성월을 맞아 구역식구들과 최경환 프란치스코 성인 묘소에서 연령을 위한 기도를 바쳤던 때가 첫 수리산성지 방문이었지 싶다. 그땐 성인묘역도 지금처럼 잘 단장되지 않아 비탈길을 힘들게 올라갔었던 것 같은데...... 성인의 집터에 고택성당도 없었다는~ 병목안 삼거리에서 수리산 성지까지는 좁은 도로를 제법 달려야 한다. 계곡을 따라 좁은 길을 달리면 계곡 양쪽 산기슭에 잇대어 지은 수리산 성지 순례자성당과 이성례마리아의 집이 있고, 골짜기 따라 조금 더 깊숙히 올라가면 이번에 처음 알게 된 최경환 성인 일가가 살았던 집터에 지은 고택성당이 있다. 사진자료 속 최경환 성인 고택은 2020년까지는 최경..
재의 수요일 사순시기가 시작되는 첫날로 사순 제1주일 전(前) 수요일, 이날 교회는 미사 중에 참회의 상징으로 재를 축성하고 재를 머리에 얹거나 이마에 바르는 예식을 행하는 데 여기서 재의 수요일이란 이름이 생겨났다. 그전해 예수 수난 성지 주일에 축성한 종려(측백)나무가지, 즉 신자들이 집 고상에 1년간 걸어놨던 성지가지를 모아 불에 태워 재를 만들고 사제가 축성하여 신자들의 머리 위에 얹거나 이마에 십자모양으로 바르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람은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십시오”(창세 3:19), 혹은 “회심하고 복음을 믿으십시오”(마르 1:15). 이는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영원한 삶을 구하라는 장엄한 외침인 것. 재의 수요일은 교황 성 그레고리오(St. Gregorius) 1세(..